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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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는 181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어퍼 캐나다로 이주하여 법률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정계에 입문하여 캐나다 연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자유보수당 창립에 기여했다. 맥도널드는 1864년 대연정을 통해 캐나다 연방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초대 캐나다 총리로서 루퍼츠랜드와 노스웨스턴 영토를 매입하고, 브리티시컬럼비아를 연방에 가입시키는 등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국가 정책을 추진하며 보호 무역주의를 옹호했다. 맥도널드는 19년 가까이 총리직을 역임하며 캐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루이 리엘 처형, 중국 이민법 제정 등 논란이 되는 정책과 원주민 기숙 학교 시스템 개발에 대한 역할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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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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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존 알렉산더 맥도날드 |
원래 이름 | John Alexander Mcdonald |
별칭 | 올드 투모로우 올드 치프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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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15년 1월 10일 또는 11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사망일 | 1891년 6월 6일 (향년 76세) |
사망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 |
안장지 | 카타라키 묘지 |
정당 | 보수당 |
다른 정당 | 어퍼 캐나다 토리당 (1843–1867) 대연합 (1864–1867) 자유-보수당 (1867–1873) |
배우자 | 이사벨라 클라크 (1843년 결혼, 1857년 사망) 애그니스 버나드 (1867년 결혼) |
자녀 | 3명 ( 휴 존 맥도날드 포함) |
교육 | 도제 제도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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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 어퍼 캐나다 |
군대 | 로열리스트 민병대 |
부대 | 상업 은행 경비대 제3 프론테낙 민병 연대 |
복무 기간 | 1837년-1838년 |
계급 | 이등병 엔사인 |
전투 | 어퍼 캐나다 반란 (몽고메리 태번 전투) |
공직 | |
직위 | 캐나다 서부 법무장관 (1854–1862, 1864–1867) 캐나다 주의 민병대 및 국방부 장관 (1860–1867) 캐나다 법무부 장관 겸 법무장관 (1867–1873) 내무부 장관 (1878–1883, 1888) 캐나다 원주민 사무 총장 (1878–1887, 1888) 캐나다 추밀원 의장 (1883–1889) 철도 및 운하부 장관 (1889–1891) |
지도부 | |
직위 | 어퍼 캐나다 보수당 대표 (1858–1867) 캐나다 보수당 대표 (1867–1891)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야당 대표 (1873–1878) |
의회 | |
직위 | 캐나다 주의 의회 의원 (1843–1867) 캐나다 하원 킹스턴 의원 (1867–1878, 1887–1891) 캐나다 의회 마켓 의원 (1878) 캐나다 의회 빅토리아 의원 (1878–1882) 캐나다 의회 레녹스 의원 (1882) 캐나다 의회 칼턴 의원 (1882–1887) |
수상 | |
직위 | 캐나다 주의 공동 수상 (1864년 5월 30일 – 1867년 6월 30일) |
재임 기간 | 1867년 7월 1일 – 1873년 11월 5일 1878년 10월 17일 – 1891년 6월 6일 |
총독 | 몽크 자작 리스거 남작 더퍼린 백작 론 후작 랜즈다운 후작 프레스턴 경 스탠리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2. 어린 시절과 교육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는 1815년 1월 11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램혼 교구에서 태어났다.[62] (영국 공식 기록에는 1월 10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아버지가 남긴 일지와 가족 기록에 따라 11일을 출생일로 사용한다.) 그의 아버지 휴 맥도널드는 상인이었으나 사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헬렌 쇼였다.[63] 존 알렉산더는 다섯 자녀 중 셋째였다.
18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어퍼캐나다 남성은 1837년 반란 동안 현역으로 소집된 향토 민병대의 일원이었다. 맥도널드는 상업 은행 경비대의 조지 웰스 대위 소속 사병으로 복무했다.[2]
1843년 킹스턴 시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844년에는 캐나다 연합 입법부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7년 윌리엄 헨리 드레이퍼 행정부에서 세입 징수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정부의 선거 패배로 곧 물러났다. 그는 기존 보수당을 넘어 더 온건하고 폭넓은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1854년 앨런 맥냅 경의 지도 아래 자유보수당 창당을 주도했다. 같은 해 자유보수당이 집권하자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내각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아버지 휴 맥도널드가 사업 실패로 빚을 지게 되자, 가족은 1820년 어퍼 캐나다(현재의 온타리오 주 남부 및 동부 지역)의 킹스턴으로 이민했다.[64] 당시 많은 이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맥도널드 가족 역시 킹스턴에 있는 친척과 연줄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했다. 가족은 처음에는 휴 맥도널드가 운영하는 상점 위층에서 거주했다. 캐나다 도착 직후, 어린 남동생 제임스가 사고로 머리를 다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휴 맥도널드의 사업은 캐나다에서도 어려움을 겪어 킹스턴 상점이 실패하자, 가족은 킹스턴 서쪽의 헤이 베이(나파니 남쪽)로 이사하여 다시 상점을 운영했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하지만 1829년 그의 아버지는 미들랜드 구역의 치안 판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맥도널드의 어머니 헬렌은 평생 동안 아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맥도널드는 처음에는 지역 학교에 다녔다. 10세 때, 그의 가족은 학비를 마련하여 그를 킹스턴에 있는 미들랜드 구역 문법 학교(Midland District Grammar School)에 보낼 수 있었다. 그는 15세에 정규 교육을 마쳤는데, 당시에는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만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으므로 15세는 비교적 일반적인 학교 졸업 연령이었다. 맥도널드는 훗날 이른 나이에 학교 교육을 마친 것을 아쉬워하며, 만약 대학에 진학했더라면 문학 분야의 경력을 쌓았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비서였던 조셉 포프에게 말하기도 했다.
3. 법률 경력
맥도널드의 부모는 그가 학교 졸업 후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당시 변호사는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길로 여겨졌으며, 공부에 흥미가 있지만 상업에는 관심이 없는 맥도널드에게 적합한 선택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맥도널드는 15세부터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훗날 "나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 15세부터 나는 자립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1830년, 15세의 맥도널드는 킹스턴의 저명한 젊은 변호사 조지 매켄지 밑에서 법률 도제 계약을 맺고 공부를 시작했다. 매켄지는 주로 기업법을 다루었는데, 이는 맥도널드 자신도 나중에 추구하게 될 분야였다. 당시 영국령 북아메리카에는 법학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변호사 밑에서 견습하며 시작과 끝에 시험을 치렀다. 맥도널드는 토론토(당시 어퍼캐나다의 요크)로 가서 어퍼캐나다 법률 협회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했다.
맥도널드는 유망한 학생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17세에는 내퍼니에 있는 매켄지의 지점 사무소를 경영하기도 했다. 1833년 여름에는 매켄지가 로어캐나다(현재 퀘벡주 남부)로 출장을 간 동안 그의 사무실을 관리했으며, 그해 말에는 병든 매켄지의 사촌 로펌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833년부터 1834년까지 맥도널드는 픽턴에서 사촌 로우더 페닝턴 맥퍼슨의 로펌을 운영했다.
1834년 8월, 조지 매켄지가 콜레라로 사망하자 맥도널드는 핼로웰(현재 온타리오주 픽턴)에 있는 사촌의 로펌에 잠시 머물렀다. 1835년, 맥도널드는 킹스턴으로 돌아와 아직 정식 자격을 갖추기 전이었지만, 자신 소유의 법률 사무소를 열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며 이전 고용주의 고객들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의 부모와 누이들도 이때 킹스턴으로 돌아왔다.
1836년 2월 6일, 맥도널드는 정식으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곧 두 명의 학생을 견습생으로 받아들였는데, 올리버 모왓과 알렉산더 캠벨이었다. 이 두 사람 모두 훗날 맥도널드처럼 캐나다 연방의 아버지들이 되었으며, 모왓은 온타리오 주 총리가 되었고 캠벨은 연방 내각 장관과 온타리오 부총독을 지냈다.
맥도널드의 초기 고객 중에는 16세의 아일랜드 이민자 엘리자 그리마슨이 있었는데, 그녀는 맥도널드의 가장 부유하고 충성스러운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맥도널드는 지역 사회에서 명성을 얻기 위해 여러 단체에 가입했으며, 아동 강간 혐의를 받은 윌리엄 브래스를 변호하는 등 주목받는 사건들을 맡았다. 브래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맥도널드는 변호 과정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1837년 반란 당시 윈드밀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미국인 급습자들을 변호했는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끈질긴 변호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기 작가 리처드 귄은 맥도널드의 초기 법률 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극적인 사건을 맡은 형사 변호사로서, 맥도널드는 킹스턴 비즈니스 커뮤니티의 좁은 틀을 넘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제 그의 인생의 가장 많은 부분을 보낼 무대인 여론 법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그의 정치 생활 전체에 도움이 될 논쟁과 설득의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4. 군 복무
맥도널드와 민병대는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토론토로 진군했다. 맥도널드의 개인 비서였던 조지프 포프는 맥도널드가 행군 중 겪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37년에 나는 머스킷 총을 들었지.' 그는 나중에 종종 말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부대가 장기간 행진했던 이야기를 해줬는데, 나는 장소를 잊었지만 토론토가 목표 지점이었다. '날씨는 더웠고, 발에 물집이 잡혔지. 나는 지친 소년이었고, 어깨를 아프게 하는 낡은 부싯돌 머스킷 총의 무게에 쓰러질 것 같았지. 하지만 나는 피로를 느끼지 않는 냉정한 늙은 병사와 보조를 맞출 수 있었지.'"
은행 경비대는 토론토 킹 스트리트에 있는 미들랜드 지구 상업 은행을 경비하며 현역으로 복무했다. 부대는 몽고메리 술집 전투에도 참여했다. 맥도널드는 1887년 제임스 고완 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3]
: "'나는 몽고메리 하우스를 향해 포문을 연 대포 뒤에 있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부대에 있었다. 반란이 일어난 주 동안 나는 킹 스트리트의 집에 있는 상업 은행 경비대에 있었고, 그곳은 후에 조지 브라운의 '글로브'의 거처가 되었다."[4]
은행 경비대는 1837년 12월 17일 현역에서 해제되어 킹스턴으로 돌아갔다.[5]
1838년 2월 15일, 맥도널드는 프론테낙 민병대 제3(동) 연대의 소위로 임명되었으나[3] 이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대신 잠시 연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며 킹스턴 주변 지역을 순찰했다.[6] 1838년 동안 킹스턴에는 실제적인 군사 행동이 없었기 때문에 맥도널드가 직접 전투에 참여할 일은 없었다. 프론테낙 민병대 연대는 윈드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킹스턴에서 현역 상태를 유지했다.[7]
5. 정치 경력
5. 1. 정치적 상승 (1843년 ~ 1864년)
1843년 맥도널드는 킹스턴 시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844년에는 킹스턴을 대표하여 캐나다 연합 입법부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7년에는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윌리엄 헨리 드레이퍼 행정부에서 세입 징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드레이퍼 정부가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기존 보수당의 한계를 넘어 더 온건하고 폭넓은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1854년 맥도널드는 앨런 맥냅 경의 지도 아래 자유보수당 창당을 주도했다. 자유보수당은 중도 성향의 개혁파는 물론 기존 보수 세력까지 아우르며 빠르게 성장했고, 같은 해 집권에 성공했다. 새로운 행정부에서 맥도널드는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내각 내에서 주지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정치적 입지는 계속 상승하여, 1856년부터 1857년까지 캐나다 동부(현재의 퀘벡 주)의 에티엔파스칼 타셰 경과 함께 캐나다 연합의 합동 주지사를 역임했다. 1857년 타셰 경이 사임하자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1858년 선거에서 맥도널드-카르티에 정부는 패배하여 합동 주지사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당시 캐나다 총독은 패배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카르티에에게 상급 주지사직을 제안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카르티에는 이를 수락하고 맥도널드를 다시 공동 주지사로 임명했다. 이는 각료가 사임한 후 한 달 안에 다시 내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법 규정을 활용한 것이었다. 이 시기 맥도널드는 캐나다 식민지 간의 통신망 확충과 방어 문제, 특히 인터콜로니얼 철도 건설에 힘썼다. 또한 캐나다는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뉴펀들랜드,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등 다른 영국령 식민지들에게 연합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862년 연립 정부는 다시 선거에서 패배했다. 맥도널드는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활동했으며, 1864년 타셰 경이 정계에 복귀하여 맥도널드와 함께 새로운 정당을 구성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5. 2. 캐나다 연방 결성 (1864년 ~ 1867년)
당시 캐나다 연합(Province of Canada)은 영국의 6개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 하나였다. 이들 식민지 사이에서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남쪽 국경 너머의 미국으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에 맞서 연방을 형성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맥도널드는 이러한 연방 결성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캐나다 연합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은 연방 논의를 가속화했다. 1864년,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와 함께 이끌던 태셰-맥도널드 정부가 무너지자, 당시 총독이었던 몽크 경은 맥도널드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다. 그러나 해산이 이루어지기 전, 정치적 라이벌이자 개혁파 지도자인 조지 브라운이 맥도널드에게 접근했다. 브라운은 이 위기를 헌법 개혁을 위한 협력의 기회로 보았다. 브라운은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간 연방 구성을 논의하는 의회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이 위원회는 정부 붕괴 직전에 보고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브라운은 인구 비례 대표제에 더 큰 관심을 두었지만, 맥도널드의 최우선 과제는 다른 식민지들을 포함하는 연방 구성이었다. 두 사람은 타협하여 새 정부가 "연방 원칙"이라는 포괄적인 구호 아래 헌법 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논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맥도널드는 브라운과의 협상 때문에 의회 해산이 연기되었다고 발표하여 의회를 놀라게 했다. 오랜 정치적 경쟁자였던 두 사람의 협력은 대연정(Great Coalition)의 결성으로 이어졌으며, 캐나다 동부(현 퀘벡주)의 루주당만이 연정에서 제외되었다.
1864년 9월 1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의 샬럿타운에서는 해양주(Maritime Provinces)들이 독자적인 해양 연합(Maritime Union) 구성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캐나다 연합은 몽크 경의 허가를 받아 맥도널드, 카르티에, 브라운을 포함한 대표단을 이 샬럿타운 회의에 파견했다. 회의 결과, 해양주 대표단은 세부 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더 큰 연방에 참여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이후 1864년 10월, 각 식민지 대표들은 퀘벡 시에 모여 퀘벡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캐나다 연방 정부의 기초가 될 72개 결의안(Quebec Resolutions)에 합의했다. 그러나 대연정은 1865년 에티엔 파스칼 타셰 총리의 사망으로 다시 위기를 맞았다. 몽크 경은 맥도널드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브라운 역시 연정 파트너로서 동등한 자격을 주장했다. 결국 나르시스-포르투나 벨로가 명목상의 총리로 임명되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1865년, 오랜 논쟁 끝에 캐나다 연합 입법부는 찬성 91표, 반대 33표로 연방 결성을 승인했다. 하지만 해양주들 중에서는 아직 연방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곳이 없었다. 1866년, 맥도널드는 뉴브런즈윅 총선에서 연방 찬성파 후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친연방 의회가 구성되도록 도왔다. 선거 직후, 노바스코샤의 총리 찰스 터퍼는 주의회를 설득하여 연방 찬성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영국 의회에서 연방을 공식화하기 위한 마지막 회의가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해양주 대표단은 1866년 7월 런던으로 떠났지만, 당시 과도한 음주 문제에 시달리던 맥도널드는 11월에야 출발하여 해양주 대표들의 불만을 샀다. 1866년 12월, 맥도널드는 런던 회의를 주도하며 뛰어난 협상 능력을 발휘하여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비서였던 휴이트 버나드의 여동생 아그네스 버나드와 교제 끝에 결혼했다(1867년 2월). 런던 체류 중이던 1867년 1월, 호텔 방에서 잠든 사이 촛불이 의자에 옮겨붙어 심각한 화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계속 참여했다.
1867년 3월 8일, 캐나다 헌법의 핵심이 되는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British North America Act, 1867)이 영국 하원을 통과했으며(상원은 이미 통과), 3월 29일 빅토리아 여왕의 재가를 받았다. 맥도널드는 준비 시간을 고려하여 7월 15일에 연방이 발효되기를 원했지만, 영국 정부는 더 빠른 날짜를 선호하여 5월 22일에 7월 1일부로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설립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1867년 7월 1일, 캐나다 자치령이 공식 출범하면서 캐나다 동부와 서부는 각각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라는 별도의 주로 재편되었다. 몽크 경은 맥도널드를 캐나다의 초대 캐나다의 총리로 임명했다. 맥도널드는 연방 결성에 기여한 공로로 같은 날 바스 훈장 기사 작위(KCB)를 받았다. 이 날은 후에 캐나다 데이로 기념되고 있다.
5. 3. 캐나다 자치령 초대 총리 (1867년 ~ 1873년)
빅토리아 여왕은 맥도널드가 캐나다 연합을 이루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기사 서임은 1867년 7월 1일 캐나다 자치령 출범과 함께 공포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열린 첫 연방 총선에서 맥도널드가 이끄는 보수당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다.
초대 총리로서 맥도널드의 주요 목표는 국가를 확장하고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부 아래 캐나다는 루퍼츠랜드와 노스웨스턴 영토를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 30만파운드 (당시 약 150만캐나다 달러, 1867년 기준)에 매입했다. 이 광대한 영토는 노스웨스트 준주가 되었다. 1870년 의회는 루이 리엘이 이끈 레드강 반란에 대응하여 매니토바 법령(Manitoba Act)을 통과시켰고, 노스웨스트 준주의 일부를 분리하여 매니토바주를 신설했다.
1871년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가 캐나다 연방의 여섯 번째 주로 가입했다. 맥도널드는 브리티시컬럼비아의 가입을 성사시키기 위해 주 정부의 부채 탕감과 10년 내 대륙횡단철도 연결이라는, 당시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해야 했다. 그는 이것이 주의 연방 이탈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판단했다. 1873년에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가 연방에 합류했으며, 같은 해 맥도널드는 새로 편입된 광대한 노스웨스트 준주의 치안 유지를 위해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당시 명칭: 노스웨스트 기마경찰, North West Mounted Police)을 창설했다.
그러나 대륙횡단철도 건설 추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1873년 퍼시픽 스캔들이 터지면서 맥도널드 정부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자유당 소속 루시우스 세스 헌팅턴 의원은 맥도널드 정부 각료들이 철도 건설 사업권을 주는 대가로 휴 앨런 경이 이끄는 사업단으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실제로 앨런 측은 보수당 선거 자금으로 17.9만캐나다 달러를 기부했고, 맥도널드 총리 자신도 철도 관련자로부터 4.5만캐나다 달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던 조르주 에티엔 카르티에에게 상당한 자금이 흘러 들어갔다. 야당과 언론은 관련자들이 주고받은 전보 내용을 공개하며 공세를 이어갔다. 카르티에는 스캔들이 불거진 후 브라이트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873년 5월 사망했다.
맥도널드는 왕립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73년 11월 3일, 그는 하원에서 5시간에 걸쳐 정부를 변호하는 연설을 했지만, 여론과 정치적 지지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1월 5일, 맥도널드는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자유당 대표 알렉산더 매켄지가 캐나다의 제2대 총리가 되었다. 이어진 1874년 총선에서도 매켄지의 자유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맥도널드와 보수당은 야당으로 밀려났다.
5. 4. 야당 시절 (1873년 ~ 187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맥도널드는 야당인 보수당을 이끌며 자유당 정부의 실책을 기다리는 데 만족했다. 그는 오랜 휴가를 보내고 법률 업무를 재개했으며, 가족과 함께 토론토로 이주하여 아들 휴 존 맥도널드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맥도널드는 알렉산더 매켄지가 이끄는 자유당 정부가 1874년 미국 워싱턴 D.C.와 자유 무역 협정을 협상한 것을 실수라고 여겼으며, 캐나다 산업 보호를 위해서는 보호주의가 필수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1873년 공황으로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자유당 정부는 대륙 횡단 철도 건설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노선 건설 자체에도 소극적이었다. 맥도널드는 자유당 정부의 느린 건설 속도로 인해 브리티시컬럼비아가 연방 가입 조건이 파기될 위험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1876년까지 맥도널드와 보수당은 보호주의를 당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입장은 1876년 여름 온타리오 전역에서 열린 여러 정치 피크닉에서의 연설을 통해 널리 홍보되었다. 맥도널드의 제안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보수당은 연이은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기 시작했다. 1876년 말까지 보수당은 보궐 선거 결과 14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매켄지 자유당 정부의 과반수 의석을 70석에서 42석으로 줄였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맥도널드는 1874년 선거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으며, 찰스 터퍼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
1877년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보수당은 자신감을 보였고 자유당은 수세적인 입장을 취했다. 토리당(보수당)이 그해 성공적인 회기를 보낸 후, 토론토 주변 지역에서 또 다른 정치 피크닉들이 이어졌다. 맥도널드는 카르티에에게 연설을 맡기면서 드물게 퀘벡에서도 유세를 벌였다. 1878년에는 더 많은 피크닉이 이어졌고, 이는 집합적으로 '국가 정책'(National Policy)으로 알려지게 될 제안들을 홍보했다. 이 정책은 높은 관세 부과, 대륙 횡단 철도(CPR)의 신속한 건설, 철도를 이용한 캐나다 서부의 급속한 농업 개발, 그리고 이민자를 캐나다로 유치할 정책들을 포함했다. 이러한 피크닉을 통해 맥도널드는 자신의 유세 능력을 과시할 수 있었고 종종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피크닉에서는 농업 해충의 원인을 자유당에 돌리고 보수당이 당선되면 해충이 사라질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제3대 캐나다 의회의 마지막 날은 맥도널드와 터퍼가 도널드 스미스 하원 의원이 퍼시픽 스캔들 기간에 보수당을 배신한 대가로 CPR의 펨비나 지선(미국 노선 연결) 건설을 허가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격렬한 갈등으로 얼룩졌다. 하원이 상원으로 소집되어 해산 명령을 듣게 된 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으며, 맥도널드는 제3대 의회에서 기록된 마지막 말로 "저 스미스라는 친구는 내가 본 가장 큰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했다.
1878년 캐나다 연방 선거는 1878년 9월 17일에 치러졌다. 맥도널드가 킹스턴에서 패배할 것을 두려워한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안전한 보수당 선거구인 카드웰에서 출마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 그는 35년 동안 자신의 고향을 대표했기에 그곳에서 다시 출마했다. 선거에서 맥도널드는 알렉산더 건에게 자신의 선거구에서 패했지만 보수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맥도널드는 매니토바주의 마르케트에서 빠르게 당선을 확보한 후 하원에 남았다. 그곳의 선거는 온타리오보다 늦게 치러졌다. 그의 취임은 그의 의원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었고, 맥도널드는 10월 21일에 선거가 치러질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빅토리아 선거구에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맥도널드는 마르케트나 빅토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빅토리아에서 정식으로 당선되었다.
5. 5. 총리 재임 (1878년 ~ 1891년)
1878년 캐나다 연방 선거는 1878년 9월 17일에 치러졌다. 맥도널드가 킹스턴에서 패배할 것을 우려한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안전한 보수당 선거구인 카드웰에서 출마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 그는 35년 동안 자신의 고향을 대표했기에 그곳에서 다시 출마했다. 선거에서 맥도널드는 알렉산더 건에게 자신의 선거구에서 패했지만 보수당은 압승을 거두었다.[11][12] 맥도널드는 마르케트, 매니토바에서 빠르게 당선을 확보한 후 하원에 남았다. 그곳의 선거는 온타리오보다 늦게 치러졌다. 그의 취임은 그의 의원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었고, 맥도널드는 10월 21일에 선거가 치러질 빅토리아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선거구에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맥도널드는 마르케트나 빅토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빅토리아에서 정식으로 당선되었다.[13][14]
총리 복귀 후 맥도널드는 선거 공약이었던 국가 정책 추진에 힘썼다. 국가 정책의 일부는 1879년 2월에 발표된 예산에 포함되었다. 그 예산에 따라 캐나다는 미국과 독일처럼 고관세 국가가 되었다. 관세는 캐나다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완성된 섬유 제품은 34%의 관세를 받았지만, 이를 만드는 기계는 캐나다에 무관세로 수입되었다.[15] 맥도널드는 남은 생애 동안 더 높은 관세를 위해 계속 싸웠다.[16]
1879년 1월, 맥도널드는 정치인 니콜라스 플러드 데빈에게 미국의 산업 기숙 학교 시스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의뢰했다.[13][14] '인디언 및 혼혈인을 위한 산업 학교 보고서'(데빈 보고서)는 1879년 3월 14일 오타와에 제출되었으며, 캐나다 인디언 기숙 학교 시스템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추구한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캐나다 정부와 교회가 협력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14] 1883년, 의회는 세 곳의 산업 학교 설립을 위해 4.3만캐나다 달러를 승인했고, 첫 번째 학교인 배틀포드 산업 학교가 그 해 12월 1일에 문을 열었다. 1900년까지 61개의 학교가 운영되었다.[13] 2015년, 캐나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이러한 동화 정책이 문화적 대량 학살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15]
1880년대에 맥도널드는 점점 쇠약해졌지만, 정치적 감각은 유지했다. 예산이 진행되면서 맥도널드는 캐나다 태평양 철도(CPR)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매켄지 정부 하에서는 이 프로젝트에 거의 돈이 쓰이지 않았지만, 맥도널드 정부는 수백 마일의 철로를 건설했고 거의 전체 노선을 측량했다. 1880년, 맥도널드는 조지 스티븐이 이끄는 신디케이트를 찾아 CPR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했다. 도널드 스미스(나중에 스트라스코나 경)는 신디케이트의 주요 파트너였지만, 그와 보수당 간의 악감정 때문에 스미스의 참여는 처음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맥도널드는 잘 알고 있었다.[18] 1880년, 캐나다 자치령(Dominion)은 영국의 남은 북극 영토를 인수하여 캐나다를 현재의 경계로 확장했으며, 1949년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뉴펀들랜드는 예외였다. 또한 1880년에 캐나다는 최초의 외교 대표인 알렉산더 갈트 경을 영국 고등판무관으로 파견했다.[19]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맥도널드와 보수당은 1882년 캐나다 연방 선거에서 약간 감소한 다수당으로 재선되었다. 맥도널드는 칼턴의 온타리오 선거구에서 재선되었다.[20]
대륙 횡단 철도 프로젝트는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받았다. CPR은 철도 노선을 따라 의 토지를 받았고, 정부로부터 2500만캐나다 달러를 받았다. 또한 정부는 CPR을 지원하기 위해 다른 철도 건설에 3200만캐나다 달러를 지출해야 했다. 특히 1881년에 410만 명의 인구밖에 되지 않는 국가에게 이 모든 프로젝트는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다.[21] 1880년에서 1885년 사이에 철도가 천천히 건설되면서 CPR은 여러 차례 재정적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로키 산맥의 지형은 험난했고, 슈피리어 호 북쪽의 노선은 위험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철로와 엔진이 머스케그에 빠지기도 했다.[22] 캐나다 정부가 CPR 채권에 대한 보증을 제공했지만, 경제가 쇠퇴하면서 채권을 판매할 수 없게 되자, 맥도널드는 재무부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이를 승인하는 법안은 회사가 파산하기 직전에 상원을 통과했다.[23]
한편, 노스웨스트 준주에서는 다시 불안이 발생했다. 많은 매니토바 메티스족이 영토로 이주했고, 토지 권리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메티스족과 정부 간의 협상은 어려움을 겪었다. 1870년부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루이 리엘은 맥도널드 정부의 묵인 하에 레지나로 여행했는데, 정부는 그가 다룰 수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24] 그러나 메티스족은 이듬해 노스웨스트 반란에서 리엘을 따라 봉기했다. 맥도널드는 철도로 수송된 캐나다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고, 리엘은 체포되어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맥도널드는 리엘의 정신 건강 상태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면을 고려하는 것을 거부했다. 리엘의 교수형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25] 리엘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이자 문화적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던 많은 퀘벡 주민들을 보수당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들은 이후 자유당 지지로 돌아섰다.[26] 1885년 노스웨스트 반란 이후, 맥도널드 정부 하에서 연방 정부는 원주민의 이동에 대한 제한을 시행하여, 그들이 보호 구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인디언부 관리자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야 했다.[27] 맥도널드 정부 하의 연방 정부는 원주민들을 굶주리게 하여 정부의 식량 공급에 의존하게 만들려 했으며, 이러한 정책은 많은 원주민의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었다.[16][17][18][19][20][21]
CPR은 거의 파산 상태였지만, 반란 진압 과정에서 군대 수송에 기여한 철도의 전략적 가치가 입증되면서 영국 의회로부터 완공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1885년 11월 7일, CPR 매니저 윌리엄 코르넬리우스 반 혼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크레이겔라치에서 맥도널드에게 마지막 스파이크가 박혀 철도가 완공되었다는 전보를 보냈다.[28] 같은 해, 맥도널드 정부는 1885년 중국 이민법을 제정하여 중국인 이민자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등 차별적인 조치를 시행했다.[22] 맥도널드는 하원에서 중국인들이 캐나다에서 배제되지 않으면 "영국 아메리카의 미래의 아리아인의 특성이 파괴될 것"이라고 발언하며 인종차별적인 논리를 내세웠다.[23] 1886년 여름, 맥도널드는 완공된 철도를 타고 서부 캐나다로 여행했다.[24] 1886년 8월 13일, 맥도널드는 은망치를 사용하여 금색 스파이크를 박아 에스퀴말트-나나이모 철도를 완공했다.
1886년, 미국과의 어업 권리에 대한 또 다른 분쟁이 발생했다. 미국 어선들이 캐나다 연안에서 불법 조업을 하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여러 척의 선박이 캐나다 항구에 억류되었다. 맥도널드는 일부 조약 조항을 무효화하는 어업법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당시 캐나다의 외교권을 행사하던 영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법안 승인을 보류했다. 상당한 논의 끝에 영국 정부는 1886년 말에 왕실의 동의를 허용했고, 미국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군함을 파견하여 어업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29]
맥도널드는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정치적 영향력 상실을 우려하여 1886년 말까지 선거를 치르려 했지만, 온타리오 주 총선에서 자유당 올리버 모왓 총리가 승리하면서 계획을 미루었다. 맥도널드는 1887년 1월 15일에 연방 의회를 해산하고, 2월 22일에 선거를 치렀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퀘벡 주에서는 자유당이 정부를 구성하는 등(1886년 10월 퀘벡 주 선거 결과) 보수당에게 불리한 상황도 있었으나, 맥도널드와 그의 내각은 겨울 선거에서 열심히 선거 운동을 벌였다. 자유당 지도자 에드워드 블레이크는 효과적인 선거 운동을 펼치지 못했고, 보수당은 온타리오, 노바스코샤, 매니토바에서 쉽게 승리하며 전국적으로 35석의 과반수를 얻었다. 보수당은 리엘 처형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퀘벡의 의석 과반수를 간신히 차지했다. 맥도널드는 다시 킹스턴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30][31] 젊은 장관들조차 맥도널드가 보수당에게 필수적인 선거 자산임을 인정했다.[32]
블레이크는 패배 후 사임했고, 윌프리드 로리에가 그를 대신했다. 로리에의 초기 지도력 하에서, 자유당은 이전과 달리 국가 정책을 반대하며 미국과의 "무제한 호혜", 즉 자유 무역을 요구하며 선거 운동을 벌였다. 맥도널드는 미국과의 일부 호혜를 기꺼이 고려했지만, 많은 관세를 낮추는 것을 꺼렸다.[33] 미국 내 자유 무역 지지자들 중 일부는 이를 정치적 연합의 전주곡으로 보았고, 이는 캐나다 내에서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34]
맥도널드는 1891년 3월 5일 선거를 치렀다. 자유당은 미국의 이익 단체로부터 많은 자금을 지원받았고, 보수당은 CPR로부터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76세의 고령이었던 맥도널드는 선거 운동 중 쓰러져 킹스턴에 있는 그의 처남 집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보수당은 일반 투표에서 약간의 이득을 얻었지만, 과반수는 27석으로 줄었다.[35] 보수당은 해양 주와 서부 캐나다에서 우세를 보였으나 중부 지역에서는 자유당과 비슷한 수준의 지지를 얻었다. 선거 이후, 로리에와 그의 자유당은 마지못해 국가 정책을 받아들였고, 로리에가 나중에 총리가 되었을 때 약간의 변경만으로 이를 유지했다.[36]
1891년 5월, 맥도널드는 뇌졸중을 겪어 부분적인 마비와 언어 장애를 겪게 되었다.[37] 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1891년 6월 6일 늦은 저녁에 사망했다.[38] 수천 명이 그의 시신이 안치된 상자를 상원 회의장에서 지나갔고, 그의 시신은 장례 열차에 실려 고향인 킹스턴으로 운송되었으며, 각 정차역에서 군중들이 열차를 맞이했다. 킹스턴에 도착한 맥도널드는 시청에서 국장으로 안치되었으며, 그는 제국 추밀원 의원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킹스턴의 카타라퀴 묘지에 묻혔으며,[25] 그의 무덤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이사벨라의 무덤 근처에 있었다.[39]
6. 개인 생활
1843년 28세의 나이에 맥도널드는 자신의 사촌인 이사벨라 클라크(1809 ~ 1857)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외할머니가 같았다.[65] 결혼 직후 이사벨라는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그녀는 약물 치료에 의존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1848년 맥도널드는 교외의 맑은 공기가 이사벨라의 건강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가족과 함께 킹스턴의 벨뷰 하우스로 이사했지만,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막 시작된 그의 정치와 법률 경력 때문에 아내와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으나, 첫째 아들 존 알렉산더 2세는 태어난 지 13개월 만에 사망했다. 둘째 아들 휴 존 맥도널드는 이사벨라가 사망한 후 맥도널드의 누이 마거릿과 그녀의 남편 제임스 윌리엄슨 부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휴 존 맥도널드는 훗날 매니토바주의 총리가 되었다. 1857년 12월 28일, 오랜 투병 끝에 이사벨라는 사망했고, 맥도널드는 일곱 살 된 아들을 둔 홀아비가 되었다.[65]
1867년 52세의 나이로 맥도널드는 수전 애그니스 버나드(1836 ~ 1920)와 재혼했다.[66] 그들은 외동딸 마거릿 메리 시어도라 맥도널드(1869 ~ 1933)를 두었는데, 마거릿은 수두증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겪었다. 맥도널드는 딸이 회복되기를 항상 바랐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67]
구분 | 배우자 | 자녀 | 비고 |
---|---|---|---|
첫 번째 결혼 (1843년–1857년) | 이사벨라 클라크 (1809–1857) |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2세 (요절) 휴 존 맥도널드 (1850–1929) | 이사벨라는 결혼 직후부터 오랜 투병 생활을 함. 휴 존은 매니토바주 총리를 역임함. |
두 번째 결혼 (1867년–1891년) | 수전 애그니스 버나드 (1836–1920) | 마거릿 메리 시어도라 맥도널드 (1869–1933) | 마거릿은 수두증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삶. 수전 애그니스는 남편 사후 어언스크리프의 맥도널드 남작부인 작위를 받음.[66][67] |
7. 유산 및 평가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는 캐나다 초대 총리로서 19년 가까이 재임했으며, 이는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 킹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기록이다. 그는 6번의 총선에서 다수당 정부를 이끌었는데, 이는 캐나다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맥도널드는 연방 결성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다양한 문화적, 민족적 배경을 가진 시민들로 구성된 광대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지역들을 통합하고, 미국의 잠재적 위협에 맞서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864년 자신의 보수당과 조지 브라운의 개혁당(후일 캐나다 자유당의 기원) 간의 대연정을 이끌어 캐나다 연방 결성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샬럿타운 회의와 퀘벡 회의를 주도하여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1867년 헌법) 제정을 이끌었고, 이는 현재 캐나다 헌법의 근간이 된다. 총리로서 그는 루퍼트 랜드와 북서 지역을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 30만파운드에 사들여 영토를 확장하고(노스웨스트 준주), 매니토바 주,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를 연방에 가입시켰다. 또한 광대한 서부 지역의 치안 유지를 위해 로열 캐나다 마운티드 경찰(당시 노스웨스트 기마 경찰)을 창설했다.
맥도널드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국가 정책(National Policy)으로 알려진 경제 정책이다. 이는 보호 관세를 통해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 캐나다 태평양 철도(CPR) 건설을 통해 동서부를 연결하며, 서부 지역의 농업 개발과 이민 유치를 목표로 했다. 특히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은 막대한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추진되어 1885년 완공되었으며, 이는 캐나다의 물리적 통합과 서부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맥도널드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한 명으로 꾸준히 평가받아 왔다.[26]
그러나 맥도널드의 유산은 심각한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의 정부는 원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1879년 니콜라스 플러드 데빈에게 의뢰하여 작성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캐나다 인디언 기숙 학교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원주민 아동들을 가족과 문화로부터 강제로 분리하여 동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13][14] 이 시스템은 훗날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의해 문화적 대량 학살로 규정되었다.[15] 또한 1885년 노스웨스트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메티스 지도자 루이 리엘을 반역죄로 처형한 결정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으며, 이는 퀘벡 지역이 보수당 지지에서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맥도널드 정부는 반란 이후 원주민의 이동을 엄격히 제한했으며, 식량 공급을 통제하여 원주민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정부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정책은 수많은 원주민의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16][17][18][19][20][21]
맥도널드는 또한 중국인 이민자에 대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1885년 중국 이민법을 제정하여 중국인 이민자에게 인두세를 부과했는데,[22] 이는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조치였다. 맥도널드는 하원 연설에서 중국인들이 캐나다에서 배제되지 않으면 "영국 아메리카의 미래의 아리아인의 특성이 파괴될 것"이라고 발언하며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23] 또한 1873년에는 캐나다 태평양 철도 건설 계약과 관련하여 휴 앨런 등으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태평양 스캔들로 인해 총리직에서 사임하기도 했다.
오늘날 맥도널드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캐나다 건국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이름은 오타와 맥도널드-카르티에 국제공항, 온타리오 401번 고속도로(맥도널드-카르티에 고속도로) 등에 사용되었고, 캐나다 10달러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27] 캐나다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킹스턴의 자택 벨뷰 하우스는 국립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인종차별적 정책과 원주민 탄압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맥도널드의 유산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17년 캐나다 역사 협회는 캐나다 역사 분야 최고 학술상 명칭에서 맥도널드의 이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42] 2018년 빅토리아 시청 앞 맥도널드 동상이 철거되었고,[37] 2021년 킹스턴 시립 공원의 동상도 캄룹스 인디언 기숙 학교 부지에서 아동 유해가 발견된 후 철거되었다.[36] 몬트리올의 맥도널드 기념비는 반복적으로 훼손되었으며, 2020년에는 동상이 넘어뜨려지고 머리가 잘리는 사건이 발생했다.[38][39][40][41] 새스커툰의 맥도널드 거리 이름은 2023년 원주민 언어인 크리어로 변경되었다.[32][33][34][35] 스코틀랜드 정부 웹사이트와 캐나다 도서관 및 기록 보관소 웹사이트에서도 맥도널드 관련 정보가 삭제되는 등,[43][44] 그의 역사적 공과에 대한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전기 작가 리처드 귄은 맥도널드의 연방 수립과 철도 건설 업적은 위대했지만, 리엘 처형, 중국인 인두세, 원주민 정책 등 잘못된 정책과 스캔들에 대한 책임 또한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역사학자 제임스 다시크는 맥도널드가 캐나다를 건설했지만, "원주민의 고생을 바탕으로 이 나라를 건설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유산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한다.[42]
8. 기타
아들 휴 존 맥도널드와 함께 잠시 캐나다 하원 의원을 지낸 바 있다. 일부 캐나다 정치학자들은 그를 붉은 토리당 전통의 창립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2004년 캐나다 방송 협회(CBC) 시청자들이 선정한 '위대한 캐나다인' 10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26] 1971년부터 2018년까지 발행된 캐나다 10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었으며,[27] 1927년에는 그를 기리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2015년 캐나다 왕립 조폐국은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2달러 동전(투니)에 그의 얼굴을 새겼다.[28]
2001년 캐나다 국회는 매년 1월 11일을 '존 A. 맥도널드 경의 날'로 지정했으나, 이는 연방 공휴일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별다른 행사 없이 지나간다. 그의 이름을 딴 다리, 공항, 고속도로, 학교 등이 캐나다 곳곳에 있다. 오타와 맥도널드-카르티에 국제공항(1993년 개명)과 온타리오 401번 고속도로(맥도널드-카르티에 고속도로, 1968년경 명명)가 대표적이다. 로키 산맥의 맥도널드 산(1887년경 명명)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역사적 평가, 특히 캐나다 원주민 정책과 관련하여 논란이 커지면서 그의 이름을 딴 시설 명칭이 변경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오타와의 '존 A. 맥도널드 파크웨이'는 2012년 이후 원주민 언어인 크리 어 '키치 지비 미칸'으로 이름이 바뀌고 있으며,[29][30][31] 서스캐처원주 새스커툰에 있던 '맥도널드 거리'는 2023년 12월, 원주민 기숙 학교 시스템 개발에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크리어로 '좋은 관계'를 의미하는 'miyo-wâhkôhtowin'으로 개명되었다.[32][33][34][35]
그와 관련된 여러 장소가 보존되어 있다. 킹스턴 외곽 카타라키 묘지에 있는 그의 묘지는 캐나다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1840년대 맥도널드 가족이 살았던 킹스턴의 벨뷰 하우스 역시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어 캐나다 공원청이 관리하고 있다. 오타와에 있는 그의 옛 자택 '언스클리프'는 현재 캐나다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의 공식 거주지이다.
맥도널드의 동상이 캐나다 전역에 세워졌으나, 최근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철거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오타와 의사당 언덕과 토론토 퀸스 파크 등에는 동상이 남아있지만, 2018년 빅토리아 시청 앞 동상은 원주민과의 화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37] 2021년 6월에는 캄룹스 인디언 기숙 학교 부지에서 유해가 발견된 후, 킹스턴 시의회가 시립 공원에 있던 동상 철거를 결정했다.[36] 2020년 8월에는 몬트리올의 맥도널드 기념비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파손되고 머리가 잘리는 사건이 발생했다.[38][39][40][41] 당시 몬트리올 시장 발레리 플랜트는 파괴 행위를 비난하며 동상 복원 계획을 밝혔다.[39]
9. 서훈
10. 역대 선거 결과
맥도널드는 지속되는 경제 불황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 상실을 우려하여 1886년 말까지 선거를 치르려 했으나, 1886년 온타리오 주 총선이 자유당 소속 온타리오 주 총리 올리버 모왓에 의해 먼저 소집되면서 연방 선거 영장을 발부하지 못했다. 이 주 선거는 연방 선거의 향방을 가늠하는 지표로 여겨졌다. 맥도널드의 적극적인 지원 유세에도 불구하고, 모왓의 자유당은 온타리오에서 과반수를 늘리며 재선에 성공했다. 맥도널드는 1887년 1월 15일에 연방 의회를 해산하고, 2월 22일에 1887년 캐나다 연방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운동 기간 중 퀘벡주에서는 자유당이 주 정부를 구성하며(1886년 10월 1886년 퀘벡 주 총선 이후 4개월 만) 퀘벡 시에서 보수당을 몰아내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도널드와 그의 내각은 겨울 선거에서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을 펼쳤으며, 터퍼(런던의 새로운 고등 판무관)는 노바스코샤에서 보수당 표를 결집시키기 위해 출국을 연기하기도 했다. 자유당 지도자 에드워드 블레이크는 상대적으로 활력이 부족한 선거 운동을 펼쳤고, 보수당은 온타리오, 노바스코샤, 매니토바에서 쉽게 승리하며 전국적으로 35석의 과반수를 확보했다. 루이 리엘 처형 문제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은 퀘벡에서도 간신히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맥도널드는 다시 킹스턴의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미래의 총리가 되는 존 스패로우 데이비드 톰슨과 같이 때때로 정책에 대해 맥도널드와 다른 견해를 가졌던 젊은 장관들조차 맥도널드가 보수당에게 필수적인 선거 자산임을 인정했다.
1887년 선거 패배 후 블레이크는 사임했고, 윌프리드 로리에가 자유당 대표직을 계승했다. 로리에의 초기 지도 아래, 이전에는 국민 정책의 상당 부분을 지지했던 자유당은 이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며 미국과의 "무제한 호혜", 즉 자유 무역을 요구하는 선거 운동을 벌였다. 맥도널드는 미국과의 일부 호혜 조치에는 긍정적이었으나, 많은 관세를 낮추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미국 내에서 "상업 연합"이라 불린 이 정책의 지지자들은 이를 캐나다와의 정치적 연합으로 가는 전 단계로 보았고, 이러한 주장을 공공연히 펼치면서 캐나다 내에서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맥도널드는 1891년 캐나다 연방 선거를 1891년 3월 5일에 실시했다. 자유당은 미국의 이익 단체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았고, 보수당은 CPR로부터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당시 76세였던 총리는 선거 운동 중 건강 악화로 쓰러져 킹스턴에 있는 처남의 집에서 선거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일반 투표에서 약간의 득표율 상승을 보였으나, 과반수는 27석으로 줄어들었다. 양당은 국가 중부 지역에서 비슷한 의석수를 확보했지만, 보수당은 해양 주와 서부 캐나다에서 우위를 점했다. 자유당 하원 의원 리처드 존 카트라이트는 맥도널드의 과반수가 "연합의 파편과 조각"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선거 이후, 로리에와 그의 자유당은 결국 국민 정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로리에가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 약간의 수정만을 거쳐 이 정책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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